돌로미테 여행기 #6. 로카텔리 산장의 별 헤는 밤 Ⅳ

Author : jingoworld / Date : 2015.02.18 03:18 / Category : JIN/여행과 사진

2014년 7월 5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코르티나 담페초 > 드라이친넨 호텔 > 로카텔리 산장

  소지품을 점검했다. 우선 손에 들고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주머니 속에도 아이폰과 돈 몇푼이 전부였다. 돈이야 얼마가 있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만큼 쓸모 없는 물건도 없었다. 옷은 그래도 두껍게 입고 왔다. 로카텔리 산장을 떠날 때, 비가 오기 시작해 입고 온 일회용 우비, 그 속에는 얇은 패딩 재킷과 속 잠바까지 입고 있었다. 조금 움직이면 더워서 옷을 벗어야 했고, 조금만 멈춰서 쉬면 금새 추워져 옷을 다시 껴입어야 했다. 너덜너덜해진 일회용 우비는 이미 입을 수 없을 정도로 걸레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무데나 버리면 안되기에 주머니 속에 잘 넣어 놓았다.

  아까 산장 출발하면서 초코바라도 몇 개 살걸. 막심한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물이라도 한 통 들고 올걸. 배가 고팠다. 그리고 갈증이 났다. 기력이 없으면 암벽 타다 자칫 실수 할 수가 있다.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다. 하늘이 도우신 것인지, 2800m에 달하는 고도이다 보니 7월초임에도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곳이 있었다. 손을 눈 깊숙이 집어넣어 하얀 속살을 끄집어 내려했다. 생각보다 눈이 딱딱했다. 손가락으로 긁어모아 눈조각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바로 삼키면 안돼. 이동하다 탈이라도 나면 끝장이다. 입 안에서 눈을 천천히 녹여 입 안을 헹구고는 뱉어 냈다. 눈을 맨손으로 헤집다 보니 손이 시려웠다.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 서서히 구별이 안되기 시작했다. 해도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라 주변 대부분은 그늘이 지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가려니 초조한 마음이 커져갔다. 다들 기다리고 있을텐데, 밥 먹을 시간이구나, 내 밥은 누가 먹었을까. 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철줄에 의지해 절벽을 내려가던 찰나에 전화벨이 울렸다. 찰나의 순간, 머리속은 급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구조해달라 그래야하나, 내 위치는 어찌 설명하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까 아픈 손님들을 모시고 시내로 내려간 김주호 대리님이었다. 전화를 받았다. 저녁 먹어야 하는데 밥을 어디서 먹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냥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으라고 대답하고 내가 지금 전화가 곤란한 상황이니 어서 끊자고 그랬다. 누군 눈 퍼먹고 있는데 맛있는 식당을 물어보다니. 그래도 이 전화가 내게 큰 동기부여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서 가서 따뜻한 산장 밥이 먹고 싶었다.

  눈이 보일 때마다 틈틈히 마른 입을 축이며 걷다보니 문제의 갈림길에 도착했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아까 굴 입구 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로카텔리 산장으로 갈 것인가. 우선 로카텔리 산장과의 거리를 파악해야 했다. 옆의 작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니 로카텔리 산장이 저멀리 작은 점으로 보였다. 거기다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어느새 이렇게 많이 올라왔던가. 길을 보니 대부분이 굴을 따라 가게 되어 있었다. 해볼만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고, 구름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가기로 마음 먹은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돌로미테가운데 움푹 파인 고개를 기준으로 우측은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Tre Cime di Lavaredo, 좌측은 파테르노 산 Monte Paterno이다. 좌측의 파테르노 산이 내가 지나온 비아 페라타가 있는 곳.


  하지만 얼마 못가 큰 난관에 봉착했다. 까마득한 절벽 하강 코스였다. 어림잡아 50미터는 넘어 보였다. 중요한 건 갈 수 있는 길은 딱 한군데인데 그곳이 죄다 눈으로 덮여있었다. 눈에는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건 비아 페라타 답게 하강 코스를 따라서 철심이 박혀 있고, 철줄이 설치되어 있어 그걸 잡고 내려가는 게 가능해 보였다. 아까 걸레 취급 받았던 우비를 꺼내 손에 감았다. 자칫 잘못하면 철줄에 쓸려 손이 다칠 염려가 있어 장갑 대용으로 만들었다. 조금씩 눈을 파헤치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바위에 눈이 붙어 있을 정도면 얼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많이 녹아서 발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내려가는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철줄을 잡고 사투를 벌였다. 온 몸이 죄다 눈 투성이였다. 차가운 눈의 촉감이 피부에 느껴졌다. 그 감촉을 느끼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금 이 순간, 이 철줄 하나에 내 몸이 메달린 상태에서 온 몸의 세포는 무사히 하강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꽤나 내려온 것 같은데 빌어먹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잠깐 멈춰서 내 몸뚱이가 반쯤 박혀 있는 눈을 긁어댔다. 어라, 얘는 좀 다네. 생사의 고비에 서있던 순간에 내 혀는 처절하게 솔직했다. 달단다.

  포기 할 순 없었다. 꾸역꾸역 내려갔다. 손에 감겨있던 우비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시야에 굴 입구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강 코스가 끝나자 거짓말 처럼 온 몸에 에너지가 끓어 올랐다. 능선 하나만 넘으면 바로 산장이었다. 바위 산 속으로 굴이 뚫려 있었고, 그 길을 따라가면 됐다. 사람 한 명쯤 만날 법도 하건만, 아까 고개 이후로 단 한명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동물도 없었다. 굴을 따라 내려가는 계단 길은 꽤나 길었다.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도 꾸욱 참고 한 발 한 발 차근히 발을 디디며 계단을 내려갔다. 드디어 출구가 보였다. 저 아래로 로카텔리 산장이 보이고 산장 벽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살아서 도착했다. 온 몸의 긴장이 다 풀리며 다리가 후들 거렸다. 산장에 가까이 가니 일행 몇 분이 밖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왜이리 늦었냐며, 걱정했다고,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다고 하셨다. 죄송스러웠다. 내 스스로의 자만심과 부주의함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뻔했다.가이드로써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해질녘 로마텔리 산장 야외 테이블로카텔리 산장에서 바라본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저녁 식사 후 야외 식탁에 모여 앉은 일행들.


 식당에 들어가니 로카텔리 산장 오늘의 저녁 메뉴였던 폴렌타(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와 굴라쉬(미트볼 비슷한 고기)가 접시에 이쁘게 담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절벽에 메달려 바둥 거리던 게 꿈만 같았다. 새삼 한국을 떠나 이곳 이태리의 돌로미테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밤 하늘은 너무나도 눈 부셨다. 거대한 암릉 사이로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떠오른 보름달과 촘촘히 박힌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 풍경에 묻힌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세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로카텔리 산장 석식얌전히 식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오늘의 저녁 식사. 폴렌타와 굴라쉬돌로미테 야경핸드폰 사진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한 컷. 실제로 보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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