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나의 첫 만년필

Author : jingoworld / Date : 2015.08.23 19:21 / Category : JIN/펜과 노트

어릴 때 부터 펜 사 모으는 게 취미였다. 책상 속 서랍에는 연필, 볼펜이 항상 가득 차 있었고, 학교가 끝나면 문방구에 들리는 게 일과였다. 노트라고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때로는 자금의 압박에 못 이겨 소매 속에 몰래 펜을 훔치고 나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방구 주인 아저씨는 고수였다. 다음 날 여느 날과 다름 없이 하교 후에 방문해서 펜 구경을 마치고 집에 가려 하는 날 아저씨가 불러세웠다. 다음 부터는 가지고 싶은 펜이 있으면 그냥 줄테니 도둑질은 하지 말라 하셨고, 그 이후에 나는 아저씨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다. 펜과 노트의 리뷰부터 시작하여 심도 깊은 성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을 아저씨와 토론하며 지냈다.

지금도 서랍을 열어보면 펜이 가득하다. 그 중에 오래 된 펜은 25년이나 지난 것도 있다. 아직 쓸만하다. 초등학교 때 잘 쓰던 연필인데 아직도 한 다스가 남아있다. 사놓고 쓰지를 않아서 저리 오래 버티고 있는 거다. 책상 정리 할 때마다 버려야지 생각은 하는데, 이상하게 그 순간만 되면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게 신기했다.

내 첫 만년필은 초등학교 5학년 생일 때 아버지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 시기에 나는 만년필을 잘 몰랐다. 솔직히 만년필에 관심이 생겨서 쓰기 시작한 게 불과 다섯 달 밖에 되지 않았다. 첫 만년필이 생겼던 당시의 핫 아이템은 지브라 사쿠라 펜이었다. 다른 펜들은 가지지 못했던 다채롭고 혁신적인 색들은 쓰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다른 펜에 비해 지나치게 비쌌지만 그 당시의 코흘리게들은 지브라 펜을 가지고 있는게 아주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그래서 용돈을 아껴가며 색색별로 사쿠라 펜을 모았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색은 하늘색이었다. 뻔한 하늘색이 아닌 진짜 우리가 보는 그런 뿌연 하늘색이어서 유독 그 색을 아꼈다. 지금도 그 펜을 보면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곤 한다. 지금은 연필을 스케치 용도로 자주 쓰는 편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필기 용도로는 쓰지 않게 되었다. 저 시기가 딱 그 과도기였다. 샤프가 싼 값에 보급이 되면서 연필보다는 샤프를 쓰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나는 만년필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때 나는 만년필에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잉크 충전 하면서 손이 지저분해지고, 마르지 않은 글씨가 번지는 게 싫었다. 하긴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는 만년필을 쓰기에 여건이 좋지 않았다. 만년필을 쓰려면 종이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쓰던 노트에 만년필을 쓰다니. 그 사용감과 잉크 번짐에 실망하게 되는 건 뻔한 결과였다.

안타깝게도 아버지께 선물 받은 첫 만년필은 나의 부주의한 사용과 관리 소홀로 몇 년 못 버티고 파손되었다(ㅜㅜ 아버지 죄송합니다). 브랜드는 커녕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나는 기억난다. 내 손에 묻었던 남색 잉크. 그래, 잉크는 남색이었다. 그의 마지막 날이 생각난다. 그의 시퍼런 피는 서랍장 안에 같이 머물던 펜들의 여기 저기에 사정없이 튀어 있었고, 그는 내장이 터진 채 서랍 한 켠에 널부러져 있었다. 바닥은 끈적거려 그의 시체를 회수하는 걸 방해했다. 비참했다. 이 사건 이후로 왠지 만년필이 싫어졌다. 아니, 더 나아가 수성으로 된 펜 자체가 싫어졌다. 그래서 유독 중성 혹은 유성으로 된 펜들만 찾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열심히 만년필을 사들이고 있고 이 글도 만년필로 초본을 작성했다. 이 기회를 빌어 소중히 대해주지 못했던 내 첫 만년필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미안.



'JIN > 펜과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펜] 나의 첫 만년필  (2) 2015.08.23
「내뱉는 말이 그 사람을 대신한다.」  (0) 2014.08.19
「효를 모르는 사람들」  (0) 2014.08.18
「메모에 대한 단상」  (0) 2014.08.18

Tags :

Trackbacks 0 / Comments 2

Statistics

  • Total : 43,626
  • Today : 24
  • Yesterday : 56

Follow Me

Copyright © JIN GO WORLD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CMSFactory.NET